합작

대탈탐 대합작 시즌 1 절대 클릭하지 마시오

어서 와 2024. 1. 30. 13:01

부팔강자님께서 도움주셨습니다!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 부족한 주최자였지만, 기꺼이 참여해 주시고 멋진 작품 선보여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참여하진 못했지만, 마음으로 응원해 주신 분들도 감사하고 이번 합작 예쁘게 봐주세요.
이번 합작을 시작으로 탈탐에도 합작 붐이 일어나길 기대해 봅니다.
다시 한번, 모두들 감사드립니다!
(*작가는 1월  31일 오후 10시에 공개됩니다. 공개되기 전까지 재미난 추리 맘껏 즐겨주세요.*)


눈동자

 

-피할 수 없는 / 오쩜 (@oh5zzom)

 

 

 

- 신보 (@imsecret)

 

 

 

 

- 개천 (@foura_m4)

 

 

 

인형

 

-대탈출 / 십이지상사 / 부팔강자 (@ bureok_gangja)

 

 

 

- 신보 (@imsecret)

 

 

 

- 댙알출(@deat_alchul)

 

 

 


 

졸업.옥상.꽃다발


 

* 탈출러 전원이 PDS바이러스에 감염 된 적 없는, 호동과 신동만 바이러스 보균자인 세계관입니다. *

꿉꿉하고 기분 나쁜 냄새. 어디선가 풍겨오는 옅은 피비린내... 몸이 으슬으슬할 만큼 차가운 공기, 가끔씩 들려오는 낮은 신음소리. 몰려오는 두려움에 신동은 잠깐 떴던 눈을 다시 질끈 감고 앞에 있는 넓은 등판에 얼굴을 파묻었다.

"호동이 형.. 어디서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아요?"

호동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 동아, 두려움의 도깨비는 항상 마음속에 있다잉."

"흐으.. 진짜 들렸는데..."

작게 중얼거리며 신동은 눈을 살짝 뜨고 조심히 고개를 돌렸다. 시야에 들어온 낡은 철문, 문 위쪽에 달린 쇠창살. 감옥인가? 신동은 생각했다.

호동의 어깨에 올렸던 손을 살며시 내린 신동의 눈길은 창살을 지나 누렇게 변색한 벽을 따라 방 한 바퀴를 돌았다. 방은 꽤나 좁아서 침대 두 개가 겨우 들어갈 것 같았다.

비좁은 창살 바깥을 열심히 살펴보던 신동은 헉, 하고 놀라며 호동에게로 돌아왔다.

"형, 저기 출입 금지 테이프 붙어있어요."

작은 창살 너머로 보이는 건너편 철문에는 노란색의 출입 금지 테이프가 X자로 붙어있었다. 그리고...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 이름표같은 네모난 것도 붙어있었다.

"이름표..인가? 잘 안보이는데."

여긴 어디고, 왜 우린 여기 있고, 출입 금지 테이프는 뭘까? 저 이름표의 의미는 뭐고 누구의 이름이 써져 있을까? 신동은 너무 혼란스러워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음을 느끼며 잠시 생각을 정리하려고 페인트칠이 벗겨진 차가운 철문에 기대 앉았다.

크게 한숨을 내쉬다가, 신동은 무언가의 신음소리 같은 작은 소리를 들었다. 신동은 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살짝 눈을 감았다. 희미하지만 바깥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피비린내가 난다는 것도 확신했다.

"형... 좀 피 냄새 나지 않아요? 비릿하게.."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호동이었지만, 신동의 후각과 촉은 무시할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그였다. 하지만 지금은 부정하고 싶었다.

"피 냄새가 어디서 나겠노, 설마 좀비겠나."

호동은 본인이 한 말에 흠칫 놀랐다. 좀비?

"...동아, 나도 좀비한테 물렸었고, 너도 저번에 좀비 됐었제..?"

신동은 좀비에게 당했던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서 머리를 세게 털었다.

"네.. 그랬죠. 그리고... 여긴 저희밖에 없고요."

그러고보니 다른 멤버들이 보이지 않았다.

호동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PDS바이러스가 아직 끝난 게 아인가?"

호동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듯 구겨진 신문을 집어 들었다. 날짜는 꽤나 최근이었다. 좀비에 대한 기사를 찾으려고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려 했지만, 그럴 필요도 없이 'PDS바이러스의 부활'이라는 기사의 제목이 첫 페이지부터 대문짝만하게 쓰여있었다.

"PDS바이러스 부활...? 형, 기사 제가 읽어봐도 돼요?"

호동은 침침한 눈을 찌푸리며 신동에게 신문을 넘겨줬다.

신동은 첫 페이지의 커다란 제목 아래에 있는 기사를 대충 눈으로 훑고 다시 처음부터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과거 전국적으로 퍼져 시민들의 불안을 야기했던 PDS바이러스는 현재 치료제가 개발되어 안전하게 감염자를 치료할 수 있게 됐다. 시민들은 '드디어 PDS의 악몽에서 벗어나는 것이냐', 'PDS바이러스 졸업이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PDS바이러스의 보균자이면서도 감염 증상이 나타나지 않거나 감염되었다가 치료된 사람들이 최근..."

기사를 읽던 신동이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와그라노, 동아?"

신동은 떨리는 목소리로 다음 줄을 읽었다. 병재는 어떻게 이런 것들을 잘 정리해서 읽는 거지? 너무 혼란스러운데, 하고 신동은 생각했다.

"...최근, 다시 감염 증상을 보이는 경우가 늘어났다."

호동은 충격에 휩싸였다. 호동과 신동은 PDS바이러스 보균자이기에 만약 기사가 사실이라면 둘은 언젠가 다시 좀비로 변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호동은 자신과 신동이 왜 여기 갇혔는지 조금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호동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신동이 머리를 한 번 털어 침착함을 되찾고 다시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긴 회의 끝에 정부는 PDS바이러스의 보균자들을 찾아 격리하기로 결정했다. 그중에는 유명 연예인 강 모 씨와 신 모 씨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의 팬들은 강하게 반발했지만 국민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며 정부는 팬들의 반대를 묵살했다. 그들이 격리 될 건물은 비공개..이다."

"......어뜩하노?"

호동이 신동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들었던 신음소리랑 옅게 났던 피 냄새가... 좀비..였나봐요. 여기 저희 말고 또 격리되어있는.. 아마도 건너편 방에 있는 사람들이 이미 좀비가 됐거나, 아니면... 되고 있거나."

신동의 정리를 끝으로, 방에는 침묵이 흘렀다. 두려움과 불안감, 혼란이 뒤섞인 침묵이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쿵!

묵직한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에 병재는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놀란 토끼 눈을 뜨고 병재를 내려다보는 피오의 얼굴이었다.

"헙, 형! 저 때문에 깬 거예요? 죄송해여.."

"아, 아니! 아니야, 깨어있었어. 근데 그 소리는 뭐야?"

병재는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며 피오에게 물었다.

"아 그게... 별 건 아니고, 여기 선반에 상자가 있길래 꺼내려다가... 떨어뜨렸어요."

피오는 머쓱하게 웃고 본인 머리보다 조금 위에 있는 선반과 바닥에 있는, 모서리가 조금 구겨진 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너는 괜찮고? 안 다쳤지?"

"네, 형!"

다정하게 피오의 안전을 확인한 병재는 자신의 몸을 덮고 있던 패딩을 옆으로 치우고 차가운 바닥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서 가장 먼저 병재가 한 것은 바로 인원 체크.

"피오 있고, 동현이 형, 종민이 형, ...어?"

호동과 신동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병재는 바로 피오에게 둘의 행방을 물어봤다.

"피오야, 호동이 형이랑 신동이 형은 어디 갔어?"

그러자 피오의 두 눈이 똥그래졌다.

"헐, 그러고 보니 없네? 어디 가셨지..?"

이런, 따로 떨어진 건가.

작게 중얼거린 병재는 피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이 있는 방을 둘러보았다. 딱히 수상한 점은 없는 평범한 사무실로 보이는 방이었다. 책상 위에 있는 컴퓨터와 모니터 앞에 쌓인 자료들. ...회사탈출인가? 병재가 생각했다.

"어, 병재야! 여기 서랍에 핸드폰이랑 신문 있는데, 너가 읽어봐야 할 것 같아. 제목이..."

단서소리꾼이 몸을 일으켜 종민에게 다가가 신문을 넘겨받았다. 방을 요리조리 둘러보던 동현과 피오도 곧 책상 앞으로 옹기종기 모였다.

"...'PDS바이러스의 부활'?"

동현이 미간을 찌푸리고 기사의 제목을 중얼거렸다.

병재는 신문을 쭉 읽어주고 종민과 동현, 피오의 표정을 살폈다. 역시 이해 못 한 것 같군.

"음.. 대충 요약을 하자면, PDS바이러스 알죠? 좀비 바이러스. 그게 재유행을 해서 호동이 형이랑 신동이 형이 시민들과 격리됐대요. 어디로 격리됐는지는 공개되지 않았구요."

"그럼 우리가 호동이 형이랑 신동이를 찾으러 가야 하나보다!"

병재의 요약에 비로소 이해를 한 다른 탈출러들의 표정이 결의에 찼다. 탈출러들은 먼저 이 방을 더 조사하기로 했다. 컴퓨터 앞에 놓인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이자 모니터가 켜졌고, 비밀번호가 걸려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들은 바로 책상 앞에 쌓인 자료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 여기 명단 있어."

동현이 종이가 여러 장 꽂혀있는 클립을 내밀었다. '격리자 탈출 프로젝트 참여자 명단'이라고 쓰여 있는 종이의 양면으로 이름, 생년월일, 전화번호 등 개인정보가 수두룩하게 적혀있었고, 몇몇을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파란색으로 줄이 그어져 있었다.

"피오야, 컴퓨터 주인 생년월일 찾아봐. 이 분 성함이.. 이다짐 씨."

병재의 말에 옆에 있던 피오가 명단을 뒤져 박다짐의 이름을 찾아냈다.

"가나다라마바사... 여깄다! 이다짐 씨, 95년 4월 9일생이에요."

피오가 전달하는 대로 병재가 컴퓨터에 950409, 이다짐의 생년월일을 치자, 컴퓨터의 잠금이 풀렸다.

"와, 비밀번호 너무 간단하게 해놓으신 거 아니에요?"

"그러게. 우리가 나쁜 사람들이었으면 정보 빼갈 수 있었겠네.. 그래도 우린 나쁘지 않으니까."

컴퓨터의 바탕화면을 살피다 '격리자 탈출 프로젝트' 파일을 발견한 병재가 파일을 열었다. 파일에는 아까 본 명단과 PPT가 있었고, PPT에 중요한 것이 있으리라 짐작한 병재가 모두를 불러 모았다.

"여기 PPT있거든요? 형들 다 오셔서 보세여. '격리자 탈출 프로젝트'가 뭔지 설명하는 것 같아요."

병재는 PPT를 열고 페이지를 넘기며 탈출러들에게 설명해주었다.

"PDS바이러스의 재유행으로 인한 격리자들을 탈출시키고 백사회의 만행을 막자...가 이 프로젝트의 의의라네요. 또 백사회야?"

"엥, 바이러스 증상이 다시 나타난다는데 격리해야지 왜 풀어주려고 해?"

동현이 근본적인 의문점을 묻자 병재가 PPT를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음.. 좀 기니까 요약해드릴게요.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팀에 원래 바이러스 보균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증상을 보이지 않았대요. 딱히 아픈 곳도 없었고. 근데도 경찰들이 보균자들을 싹 잡아가니까 수상해서 조사를 해봤는데..."

병재가 침을 꿀꺽 삼켰다.

"고의적으로.. 증상을 만드는 거였대요. 백사회가 악의적으로... 변종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그에 대한 백신과 치료제를 만들어서 비싸게 팔려는 계획으로 보인대요."

"...그런 어마어마한 사건을 우리가 맡아도 되는 거야..?"

"지금은.. 우리 말고 여기 딱히 사람이 없으니까, 그렇지 않을까요. 호동이 형이랑 신동이 형도 구해야 하고.."

종민의 겁에 질린 질문에 병재가 답했다.

"그럼 보균자들 잡아간 것도 백사회겠네. 경찰을 사칭해서."

동현의 날카로운 추리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까 본 신문도 백사회가 낸 가짜 기사래요. 보균자들은 그 가짜 기사만 믿고 얌전히 잡혀간 거고."

"한시라도 빨리 형들을 구해야 해요. 장소 찾아보죠."

병재의 추가적인 정보를 들은 피오가 탈출러들이 지금 해야 하는 일을 상기시켜줬다.

다행히 이 '격리자 탈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사람들은 격리자들이 어디에 갇혀있는지까지 알아낸 듯했다. 방을 구석구석 뒤져 찾아낸 주소로 그들은 당장 출발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형 근데, 이상하지 않아요?"

"모가."

"안전한 치료제까지 개발된 PDS바이러스가 왜 갑자기 다시 유행을 하는 걸까요? 변종 바이러스가 생긴 건가?"

"머.. 그럴 가능성도 없진 않제."

"..형은 안 무서워요?"

"......"

우리가 다시 좀비가 될 수 있는 거잖아요,

호동의 굳은 표정을 본 신동이 마지막 말을 삼켰다.

"우리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없을까?"

잠시 이어진 침묵을 깨고 호동이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더러운 벽과 녹슨 문, 바닥에 놓인 구겨진 신문 뿐이었다.

"음... 철사라도 있었으면 문이라도 따봤을 텐.."

덜컹, 끼이이..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윽고, 미처 발견하지 못 한 문 하단에 위치한 구멍으로 무언가가 쑥 들어왔다.

"우악!!"

갑자기 방으로 들어온 그릇에 신동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호동도 적잖이 놀랐지만 방구석에 쪼그려 앉아 떨고 있는 동생을 괜찮다고 진정시켰다.

"괜찮데이, 이거 그냥 빵이다. 빵이랑 물."

"빵..? 진, 진짜 무슨 감옥이에요? 아무리 바이러스 보균자라지만, 이건 인간 취급도 아니.."

"닥치고 주면 먹어. 싫으면 굶든가."

갑작스럽게 밖에서 들려오는 거친 발언에 신동이 다시 놀랐다.

"..누구세요? 저희 왜 갇힌 건지 아세요?"

"시끄러, 좀비 되기 싫으면 입 닫고 기다리라. 아, 크큭.. 어차피 기다려도 좀비 되겠구마."

뭐야, 저 기분 나쁜... 웃음은.

어색한 사투리가 섞인 말투로 험한 말을 내뱉던 남자는 빵을 한 개 더 문 안으로 넣어주고는 나가버렸다.

"...저 사람 뭐야? 저희 가둔 사람이겠죠?"

호동에게 툴툴대던 신동이 빵을 집어 들자, 호동이 갑자기 그의 손에서 빵을 낚아챘다.

"..이거 수상하데이. 먹지 마라. 안에 뭐 있을 것 같다."

배고픈데.. 라고 투정을 부리던 신동이 빵을 반으로 가르자, 빵의 정 중앙이 뽀얀 흰색이 아닌 초록색이었다!

"와, 와.. 아니, 형 어떻게.. 이거...진짜 누가 봐도 먹으면 안 될 것처럼 생겼는데요?"

"...그냥 뭔가 느낌이 안 좋았다. 동물적인 감각이랄까."

"근데 형, 저 배고파요."

먹음직스러운 빵을 눈앞에 두고 그저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는 신동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곧 애들이 구하러 오겄지. 아들 믿고, 기다려보자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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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러들이 도착한 곳은 낡아 보이는 께름칙한 건물이었다. 아직 해가 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문 안은 깜깜해 보였다.

"이.. 건물이야? 너무 허름한데.."

"주소가 틀렸을 것 같지는 않으니 여기가 맞아요."

종민의 질문에 병재가 사무실에서 획득한 주소를 다시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일단 들어가죠. 형들이 무슨 상황에 처해있는지 모르니까, 빨리 가야 해요."

"너가 먼저 가봐 피오야, 우리 여기 있으니까."

"아 형..!!!"

동현과 피오의 실랑이 끝에 결국 종민이 먼저 들어가기로 결정됐다. 아무래도 호동과 신동의 생사가 관련된 문제라, 종민을 선두로 탈출러들은 무서운 감정을 억누르며 어두컴컴한 건물로 들어갔다.

호동과 신동이 몇 층,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기 때문에 탈출러들은 일단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며 상황을 살펴보는 것을 선택했다.

3층에 도달했을 때쯤, 열려있는 문틈 사이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어, 여기 문 열려있는데? 들어가 볼까?"

종민이 조심히 문을 활짝 열고 안쪽으로 발을 디뎠다. 조용한 방 안,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를 들은 종민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때,

"으업..!!"

"병재야!!"

뒤에서 까만 남자가 병재를 덮쳐 헤드록을 걸었다.

"얘, 살리고 싶으면 손 들고 물러나."

남자의 말에 방의 가장 안쪽에 있던 피오가 종민의 팔을 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하. 진짜 여기를 우째 알고 온 건진 모르겠다만은, 느그들이 아는 것보다 훨씬 무서운 것들이 많을 거여. 살고 싶으면 입 닫고 고대로 나가ㄹ...우욱!"

남자의 뒤에서 튀어나온 동현이 어느새 그의 목을 감싸 초크를 걸고 있었다!

동현은 조금 무서웠던 나머지 먼저 방에 들어간 멤버들의 조금 더 뒤에 있던 것뿐이었다. 멤버들의 뒤에서 튀어나온 까만 남자는 동현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고, 이를 기회로 동현이 자신의 기술을 사용해 남자를 기절시키는 데 성공했다.

"욱, 콜록, 커흑.. 와..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동현이 형 고마워요.."

"내가 항상 말했지? 이거 10초면 기절한다고."

"...죽은 거 아니죠?"

다행히 쓰러진 남자의 심장은 뛰고 있었다. 혹시 무언가 중요한 것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는 마음에 남자의 몸을 뒤져서 찾아낸 것은 녹슨 열쇠 하나뿐이었다.

"열쇠..? 이거 호동이 형 갇혀있는 곳 열쇠인가?"

종민이 열쇠를 집고 말하자, 저 구석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쫑미나!!!! 아이 놔바라. 종민이 맞다니까. 종민아!!!"

종민, 동현, 병재, 피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들은 바로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달려갔다.

"형!! 다친 데는 없, 으악!!!"

호동의 목소리를 따라 호동과 신동이 갇힌 방 앞에 도착한 동현이 반대편 방바닥에서 새어 나와 굳은 피를 보고 놀라 날아갔다.

"어, 잠깐만. ......이다짐? 이분.. 격리자 탈출 프로젝트..."

병재가 방문에 붙어있는 이름표를 발견하고 숙연해졌다.

"이다짐 씨, 격리자들 구하려다.. 들켜서 갇히신 것 같아요. ...그리고, 돌아가신 것 같네요.."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여기도 이름표 있네, 강호동, 신동희."

종민이 호동과 신동이 갇혀있는 방의 문을 열며 말했다. 그들은 재회의 감동을 누리며 잠시 포옹을 나눴다.

피오가 이다짐이 갇혀있는 방 앞에 떨어진 모루를 주워 들고 이리저리 살피곤 말했다.

"다짐 씨 조카가 만들어줬나 봐요. 여기 '다짐 이모♡'라고 써져있는... 철사꽃..."

엉성한 꽃잎을 가진 꽃다발을 바라보는 호동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숭고한 희생을 하신 이다짐 씨를 위한 묵념을 마친 탈출러들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앞서 계단을 내려가던 종민이 갑자기 멈춰 서며 다급히 올라가라는 손짓을 했다.

"밑에, 밑에 사람들 있어..! 아까 본 그 까만 사람들!!"

"...백사회다. 빨리 올라가요, 아까 기절했던 사람 깨어나서 지원 불렀나 봐!"

병재가 그들의 정체를 추측하며 옥상을 향해 달렸다.

옥상 문을 벌컥 열자 탈출러들을 반기는 것은 작은 헬기와 경찰들이었다. 그들은 탈출러들에게 경계심을 드러냈지만 병재를 필두로 탈출러들이 열심히 해명한 끝에 경계를 풀 수 있었다.

"아래층에 백사회라는 아주 나쁜 조직이 있어요! 백사회가 거짓으로 기사를 쓰고 고의로 바이러스를 퍼뜨렸어요. 증거도 있습니다!"

병재가 주머니에서 USB를 꺼내 경찰에게 넘겼다.

"와, 너 그거 어디서 난 거야? 언제 준비했대?"

"백사회를 고발하려면 그 증거가 있어야 하니까, 증거 다 있는 그 격리자 탈출 프로젝트 PPT좀 USB에 담았어요. 필요할 것 같아서."

병재의 철저한 준비성에 동현이 연신 감탄했다.

"아무튼, 백사회는 저희가 해결하겠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경찰들이 우르르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옥상에 있던 모든 경찰들과 헬기가 떠나자, 아깐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탈출단이 탈출러들의 눈에 들어왔다.

"탈출단이다!!"

모두가 오랜만에 보는 탈출단이라, 그들은 들뜬 마음으로 달려갔다.

"아, 형! 잠깐만요!"

달리기를 멈춘 피오가 손에 쥐고 있던 엉성한 모루 꽃다발을 옥상 가장자리에 내려놓았다.

"저건 왜 저기에 놨어?"

신동의 물음에 피오가 멋쩍은 듯이 웃으며 말했다.

​ "아ㅎ, 그냥... 저기 두면 다짐 씨가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저기서도 잘 보이게 놨어요. 소중한 거니까.."

피오가 가리키는 하늘을 쳐다본 탈출러들이 일제히 숙연해졌다. 짜식, 이렇게 마음이 이뻐서 말이야.

​"아무튼, 우린 마무리 하죠! 다짐 씨도 기뻐할 거예요."

신동의 마무리 멘트와 함께 모두가 탈출단 위로 올라갔고,

다함께 외쳤다.

"성공! 대~탈출!!"

- 모가탈출 (@DTCUtkfkdgo)



 

“작동이 된 건가? 손이 왜 안 움직이지?”

“제배도 박사님. 여기 회로를 연결하셔야지 작동됩니다.”


연구원이 회로를 집어 제배도 박사에게 넘겼다. 박사는 호탕하게 웃으며 회로를 AI에게 이식하곤 등에 있는 전원 버튼을 눌렀다.

AI는 관절을 까딱거리며 천천히 깨어났다. 아직 자신이 무슨 상황에 놓여져 있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주변을 둘러보며 장소를 기억하고, 인간을 보며 누구인지 인식하기 시작했다.


“지금 날짜로부터 약 20년 전에 완공된 판타스틱 로보틱스 지하에 있는 연구소. 두 분은 저를 만들어 주신 사람으로 추정. 한 분은 제배도 박사. 다른 한 분은 기계공학 연구원—”

“잠깐… 이제 그만 말해도 괜찮다.”

“명령을 수행합니다.”


AI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아무런 말을 하고 있지 않지만, 홍채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니 자료를 수집하는 중인 것 같다.

제배도 박사는 오류 하나 없이 완벽하게 만들어진 AI를 보며 만족했다. 하지만 무언가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다른 로봇들이랑 큰 차이가 없기도 하고, 민간인이 다가가기에는 너무 어려운 느낌이 들었다.


“그래. 이름을 지어주면 어떨까.”

“진심이세요…? AI에게 이름이라뇨.”

“이름을 지어주는 편이 친근하고 좋지 않나?”


연구원은 박사님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제배도 박사는 곰곰이 이름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비는 어떠냐?
키우던 고양이 이름 같아요.
그, 그럼 네로는?
그것도 기각입니다. 다른 이름으로 좀 해봐요.

박사는 끙끙거리며 큰 고민에 빠졌다. 로봇을 만들 때보다 더 힘들어하는 모습에 연구원도 같이 이름을 생각해 주었다.

그때, 박사의 뇌에서 빠르게 한 단어가 떠올랐다.


“…피노.”

“오? 그거 괜찮은데요?”

“자, 잘 들어라. 이제부터 너는 피노란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던 AI는 조용히 단어를 읊었다.


“…그것이 제 이름이군요. 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이름은 피노. 만나서 반가워요.”


AI에게 감정이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박사의 눈에는 피노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새로운 장난감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



판타스틱 로보틱스가 내세운 피노는 로봇 개발에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지금까지 다른 이들이 개발한 로봇은 그저 인간의 일을 돕는 기계 덩어리들뿐이었다. 하지만 피노는 달랐다. 인간과 소통이 가능하고, 무엇보다 자기 스스로 느끼는 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커다란 차이를 느끼게 해주었다. 덕분에 판타스틱 로보틱스는 감정을 지닌 인공지능 안드로이드를 만드는 최고의 회사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런 회사 앞에서, 피노를 원한다는 한 통의 연락이 도착했다.


“희망연구소에서?”

“네. 9살 아이와 대화를 할 수 있는 로봇을 원한다고 왔는데… 많은 로봇들 중에서 피노를 원한다고 하더라고요.”

“아마 이름 때문인 것 같구나. ‘피노’라고 하면 어린아이들도 거리낌 없이 다가갈 수 있으니.”


제배도 박사는 희망연구소에 대해 검색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이상한 연구소에 팔려갈 수 있으니, 그 점을 대비하기 위해 사전조사를 하는 것이다.


“희망연구소… 아, 여기있다.”


인터넷에 검색해서 나온 희망연구소는 특이한 점이 있었다. 폐쇄된 군사시설에 임시로 지은 연구소라고 한다면… 그쪽에 무슨 큰일이 생겼다는 뜻 아닌가.

더 자세히 찾아보려고 했지만 지금 검색해서 알아볼 수 있는 자료는 한정적이었다. 박사는 불명확한 연구소에 피노를 보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피노를 빌리는데 거액의 돈을 지불하겠다는 연구소의 입장을 마냥 무시할 순 없었다.

아무리 잘 나가는 회사라도 돈과 자신들의 로봇을 광고하지 않으면 나락으로 떨어지기 쉬운 법. 고민 끝에 박사는 희망연구소에 피노를 보내기로 결정한다.


“안녕하세요. 판타스틱 로보틱스에서 온 AI, 피노라고 합니다.”


허리를 숙여 연구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연구원들은 인간과 똑같이 행동하는 피노의 모습에 감탄을 지어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인간과 비슷하다는 것에 이질감을 느껴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다.

인사를 받은 김미영 박사는 손뼉을 가볍게 치곤 입을 열었다.


“피노가 해야 할 일은 아주 간단해. 우리 연구소에는 한 아이가 있는데, 또래 친구를 만들어주지 못해서 매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 뭐니. 그래서 네가 우리 희망이의 친구가 되어줬으면 좋겠어.”

“알겠습니다.”

“그러면… 인사를 한 번 나눠볼래?”


김미영 박사의 뒤에서 작은 아이가 슬금슬금 나왔다. 아직 피노가 낯선지 작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그, 그러니까… 안녕.”


피노는 메모리 데이터에서 제배도 박사가 넣어준 ‘어린아이를 대하는 법’을 찾아 데이터를 재빨리 열어 확인했다.


“반가워. 나는 피노라고 해. 너는?”

“…희망, 최희망…”

“여기에 있는 동안 잘 부탁할게.”


손을 건네자 희망이는 더욱더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쭈뻣거리며 손을 잡았다. 손을 잡자 희망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피노를 바라보았다.


“손이 딱딱해?”
“나는 로봇이거든.”

“로봇…! 나도 잘 부탁할게.”


살짝 어색하지만, 이렇게 희망이와 피노의 첫 만남은 시작되었다.


피노가 희망연구소에 온 지 약 3주가 지나고, 피노는 희망이와 많이 친해졌다. 같이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고, 자기 전에 매일 옆에 있어준 덕분에 희망이는 웃는 날이 많아졌다. AI라고 싫어하던 연구원 사람들도 피노를 잘 따라주는 희망이를 보고 경계심이 풀렸는지 인사를 건네는 이들도 있었다.

어느 날 희망이는 사과주스를 마시며 피노에게 물었다.


“있잖아, 뭐 물어봐도 돼?”

“뭔데?”

“피노는 신기한 것 같아. 로봇은 감정을 못 느끼는데, 피노는 나처럼 감정을 가지고 있잖아! 어떻게 한 거야?”

“사실 나도 다른 로봇들처럼 ‘감정’이라는 것이 없었어. 딱딱한 말투를 쓰고 명령받은 것만 하는 기계였지. 내가 감정을 가지게 된 건 기적이라고 할 수 있어.”


희망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피노의 말을 경청해 주고 있었다.


“나를 만들어준 박사님은 아주 친절했어. 진짜 인간의 아들인 것 마냥 잘 챙겨줬지. 물론 주변에 있던 연구원들도.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고… 박사님은 나에게 질문을 했어. ‘인간처럼 감정이라는 걸 느껴보고 싶냐’고. 데이터를 많이 모아야 했던 나는 당연히 알고 싶다고 했어.”



“감정을 느끼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단다. 자신의 생각이 어떤지 몇 번이고 곱씹어 보는거야. 자, 눈 앞에 넘어져서 무릎이 까진 바람에 울고 있는 아이가 있다고 상상을 해보거라. 어떤 것 같니?”

“아이가 넘어졌습니다. 무릎이 까졌다고 하니 치료를 해야합니다. 이상입니다.”

“으음… 그것 말고 다른 생각은 안 들었니?”

“치료를 못 하는 상황이라면 제가 도와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 생각이 든 이유는 무엇이니?”

“그대로 아이를 방치한다면 아이는 계속해서 울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그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에겐 웃는 모습이 좋다고 결론이 났습니다. 이것은 어떤 감정에 속하는 것입니까?”


제배도 박사는 피노의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감정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모르는 것뿐, 피노는 스스로 감정을 깨쳤다.


“…그건 걱정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이란다. 남이 눈물을 흘리거나 고통받는 모습이 아니라, 웃거나 행복하게 있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란다.”

“걱정, 걱정… 그렇군요. 기억하겠습니다.”


피노는 낯선 감각을 되풀이하며 천천히 배우기 시작했다. 사소한 일상에서 우러나오는 감정도 빠짐없이 데이터에 기록하고, 다시 상기시키고, 몇 번이나 고민했다.

그 이후로 피노는 진짜 인간들처럼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혹시—”


희망이는 피노에게 무언가 더 말하려고 했지만, 김미영 박사가 문을 똑똑 두드리며 희망이를 불렀다.


“지금 가야 해. 안 그러면 늦어.”

“아… 네!”

“희망이랑 놀아줘서 고맙다, 피노야.”


김미영 박사는 눈웃음을 짓더니 희망이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 피노는 사과주스 팩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주변 정리를 간단하게 끝냈다. 깔끔해진 방을 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방을 나서려고 하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노는 자신도 모르게 조용히 문 뒤로 숨었다.


“휴우~ 진짜 힘들지 않냐? 대형 프로젝트 때문에 맨날 야근이나 하고 있고….”

“야근하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뭐? 어린애 기분도 맞춰가면서 일을 해야 해?”

“진짜 복지 최악이다. 애 하나 때문에 이게 뭐야?”


몇몇 연구원들의 짜증 어린 목소리와 누군가를 헐뜯는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연구원들이 힘들어서 푸념을 늘어놓는 것은 이해가 되었지만, 피노는 그 뒤에 나온 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연구소에서 어린이라고 부를만한 사람은 희망이 밖에 없다. 희망이가 없으면 시작할 수도 없는 프로젝트인데, 그저 자신이 힘들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뒷담을 하는 행위가 맞는 것인가?


“가끔씩 최희망을 보면 한 대 때리고 싶어진다니까.”


[프로그램에 일시적인 장애가 생겼습니다.]


속이 답답하게 끓어오르는 느낌이 몸을 뒤엎었다. 진정하고 싶어도 사고회로가 자꾸만 막혔다. 프로그램이 오류를 난발한다. 인간을 공격하면 안 된다. 희망이가 있는 연구소의 사람이니 더욱더 공격하면 안 된다.


“이 프로젝트가 끝나기만 하면, 그 멍청한 꼬맹이는 눈앞에서 치워버릴 거야.”


[프로그램 에러—!!]


“푸핫! 진짜 웃… 어라? 야! 뒤에 봐봐!”


기세등등하던 연구원의 모습은 사라지고 분위기가 이상해진 피노를 보며 몸을 조금씩 떨었다. 멈추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나아갔다. 피노의 시야는 이미 에러 창으로 붉게 물들여서 인간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피노는 ‘분노’라는 감정을 깨우치고, 처음으로 인간에게 공격을 했다.

로봇이 인간을 공격한 사실이 연구소 전체에 퍼져나갔다. 연구소 사람들에게 피노는 한순간에 ‘위험한 로봇’으로 자리 잡았고, 경멸 어린 시선을 받게 되었다.

더 이상 희망이를 봐줄 수 없고, 인간에게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피노는 희망연구소에서 쫓겨났다. 평소에 피노를 아끼던 김미영 박사는 인간을 왜 공격했냐고 물었지만, 피노는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않고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인간은 나약하고 멍청한 것 같아요.”


그저 이 한 마디만 하고 판타스틱 로보틱스로 돌아갔다.



피노가 떠난 뒤 약 일주일 후, 희망연구소에는 좀비 바이러스가 터지는 일이 발생했다. 몇몇 사람들은 탈출에 성공했지만 다른 이들은 좀비가 되었거나 숨어서 지내고 있다는 것 같았다.

판타스틱 로보틱스로 돌아간 피노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분이 어떠냐는 제배도 박사의 물음에 피노는 감정 변화 없이 ‘그렇군요’라고 말할 뿐,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제배도 박사는 예전처럼 돌아가버린 피노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피노.”

“무슨 일이시죠?”


박사는 피노를 위해 희망연구소에서 일어났던 오류를 고쳐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피노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으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판타스틱 로보틱스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소문인 줄 알았으나, 사람들이 사라지는 현상이 꾸준히 일어나고 있었다. 제배도 박사는 피노의 오류를 고쳐주는 일을 멈추고 사람들을 불러 지금 일어나는 현상을 조사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현상 조사를 하러 간 사람들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박사는 자신이 직접 찾아보려고 나섰다.

방문을 열자 피노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 박사님.”

“피노야. 요즘 사람들이 사라지는데, 이유를 알고 있니?”

“아… 그 사건 말이군요. 네! 알고 있어요.”


로봇이라 모를 줄 알았는데. 마침 피노가 알고 있다고 하니 한시름 놓았다. 작은 단서라도 필요한 상황이니, 박사는 피노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며 무슨 일인지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판타스틱 로보틱스에 있는 폐기된 로봇 몇몇이 오류를 일으켜서 사람들을 잡아가거나 죽이고 있다는 말이냐?”

“네… 저도 얼마 전에 알아낸 사실이에요.”

“하아, 보안을 좀 더 강화시켜야겠구나. 고맙다 피노야.”


피노는 방긋 웃었다. 제배도 박사도 덩달아 웃어주려고 했지만, 배에서 무언가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어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단순히 천장에서 물이 떨어진 거라고 생각해 손으로 대충 닦았다.


“박사님! 손에… 손에 피가…!”

“피? 그게 무슨—”


그 말을 마지막으로 판타스틱 로보틱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사라졌다. 폐기된 로봇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 로봇 한 대만이 남은 채.



***



희망연구소의 좀비 사태와 판타스틱 로보틱스에서 모든 사람들이 사라진 일이 일어나고 약 1년 뒤, 이 1년이라는 시간은 세상에 많은 변화를 일으키는데 충분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6명의 남자들이 희망연구소에서 희망이를 꺼내주었고, 좀비 사태를 누그러트렸다. 그리고 판타스틱 로보틱스 사람들을 살해한 범인인 피노를 막아주는 대단한 일을 했다는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그 6명을 찾고 싶어 했지만 아쉽게도 찾을 수 없었다.

희망연구소에서 살아남은 희망이는 자신을 돌봐준 김미영 박사와 같이 지내고 있다. 둘이서 살기 충분한 집을 구한 김미영 박사는 좀비들로 인해 세상을 두려워하는 희망이를 열심히 돌봐주었다. 꾸준한 노력 끝에 희망이는 이제 더 이상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건강하게 자랐다.


“다녀오겠습니다!”

“잘 갔다 와, 희망아.”

“네!”


희망이는 가방을 메고 힘차게 집을 나섰다. 큰 도로를 지나고, 버스를 타고 5개의 정류장을 지나치고, 버스에서 내려 바로 앞에 있는 골목을 들어가기만 하면 학교가 나온다. 등굣길에 만나는 친구들과 인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면 어느샌가 교실까지 도착한다. 희망이는 이런 사소한 것이라도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희망아 안녕~”

“안녕!”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자마자 떠드는 걸 좋아하는 짝꿍이 바로 말을 걸었다.


“너 혹시 그 소문 알아? 우리 학교 밖으로 나가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아무도 안 가는 작은 공원 있잖아. 거기서 누가 로봇을 봤다는 거야!”

“로봇? 이제 로봇은 안 나오지 않아…?”

“내 말이! 판타스틱 로보틱스가 무너진 이후로 더 이상 로봇을 만들지 않기로 했었지! 아무튼, 우리 학교 애가 로봇을 발견했는데 엄청 무섭게 생겼다는데? 얼굴 피부도 다 벗겨지고 팔 한 쪽도 없다는 거야. 키는… 어린애처럼 작대!”


짝꿍이 말하는 로봇의 설명을 듣자, 희망이는 머릿속에서 빠르게 한 로봇이 떠올랐다. 어릴 때 연구소에서 짧게 만남을 가졌던 피노.

진짜 피노일까? 희망이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학교가 끝나는 대로 친구가 알려준 공원으로 바로 뛰어갔다. 천천히 걸어가도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지만, 늦게 가면 그 로봇을 마주치지 못할 것만 같아 숨이 차오를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허억… 허억….”


공원에 도착하자 희망이는 귀신이라도 나올 법한 분위기에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관리도 하지 않는지 잡초는 무성하게 자라있었고, 시들어버린 꽃들은 낙엽처럼 힘없이 떨어져갔다.


“저, 저기—! 아무도 없나요?”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희망이의 목소리. 다시 한번 더 크게 소리 내어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희망이는 공원 안쪽까지 걸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잠깐이면 돼.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도망가면 되니까….”


희망이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공원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분위기는 더욱더 으스스 해졌다. 녹이 슬어버린 놀이터 기구에서 나는 꺼림직한 소리가 싫어서 도망가고 싶었지만, 피노를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얄팍한 믿음에 계속해서 나아갔다.



“피노—! 혹시 있어? 있으면 대답이라도 해줘!”


몇 시간 동안 돌아다녔지만 커다란 성과는 없었다. 계속 돌아다닌 탓에 다리가 너무 아팠다. 희망이는 근처 벤치에 앉아 숨을 골랐다.


“휴우….”

“여기에는 왜 온 거야.”

“응? 그야 당연히 피노를 찾기 위해서… 으아악!!”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한 공원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깜짝 놀란 희망이는 도망가려고 했지만, 모자를 꾹 눌러쓴 어린아이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깜짝이야… 그냥 어린애구나.”

“여기는 위험해서 아무도 안 오는데.”

“위험하다고? 그러면 너도 오면 안 되는 거잖아.”

  “진짜 예전이나 다를 게 없네…”

  “칭찬이야? 근데 그렇게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으면 안 불편해? 조금만 올려도 편할 텐데…”

  “자, 잠깐만 지금 뭘 하려는 거야!”

희망이는 빠르게 아이의 모자를 살짝 들어 올렸다. 두 눈이 마주쳤는데, 희망이는 이 아이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 짝꿍이 말해주었던 것처럼 얼굴 피부가 벗겨져있었다. 그리고 한쪽 팔이 없는 것까지. 무엇보다 몇 년 동안 바뀌지 않은 익숙한 얼굴—

어릴 때 기억에 남아있는 피노와 똑 닮았다.


  “피노? 너 피노 맞지?!”

피노는 당황해하며 모자를 꾹 눌러썼다. 그리고선 급하게 자리를 피했다.


“나…! 곧 있으면 중학교 졸업해! 1월 28일에 하는데… 혹시 올 수 있으면 와줘! 바쁘면 못 와도 괜찮으니까…! 알고 있어!”


피노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해서 뛰어갔다. 희망이는 피노가 들었을 거라 믿고, 피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희망이는 피노를 만났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김미영 박사에게 말했다간 일이 커질 것 같고, 같은 반 친구들에게 자랑거리로 말할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피노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 공원에 몇 번이고 다시 가보았지만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희망이는 더 이상 그 공원에 가지 않았다. 평소처럼 일상을 즐기고 학교생활을 열심히 하는 등 자신에게 더 집중하고 싶었다.

그렇게 희망이는 중학교 3학년 겨울,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차가운 겨울 바람에 코 끝이 빨갛게 올라오고, 눈이 솜뭉치처럼 조금씩 내리는 희망이의 졸업식 날이 다가왔다.


“아직 내 눈에는 아기 같은데… 벌써 중학교 졸업이라니! 희망아, 여기 봐봐. 사진 찍자”

“이제 고등학생이거든요! 아기 아니에요!”


부끄러워하는 희망이를 보며 김미영 박사는 킥킥 웃었다. ‘시간이 지나도 남는 건 추억이 담긴 사진이다.’라는 말을 계속 하면서 사진을 많이 찍었다. 희망이의 친구들과도 찍고, 꽃다발을 들고 방긋 웃고 있는 사진도 여러 장 찍었다.


‘피노는 안 오려나….’


희망이는 피노가 오길 내심 기대했지만 졸업식이 끝날 때까지 보이지 않았다. 혹시 몰라 운동장에 20분 정도 더 기다렸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친구들이랑 사진까지 다 찍은 희망이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자 김미영 박사가 물었다.


“누구 기다리니?”

“…네. 친한 친구가 한 명 있는데 안 보여서….”

“길이 엇갈렸나 보구나. 아, 내가 옛날에는 친구들이랑 길이 엇갈리는 걸 방지해서 정해놓은 규칙이 있었어. 몇 시까지 보이지 않을 시에는 ㅇㅇ문방구 앞에서 기다린다!”

“뭐예요 그게!”

“고전적인 방법 같지만 때로는 효과가 좋아. 예전에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은 없어?”


희망이는 단편적인 기억만 남은 어릴 때의 일을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내가 자라고 나면 피노가 못 알아볼 수 있는데, 그때는 어떡하지?”


어린 희망이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피노는 그렇게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웃었다.


“괜찮아! 내 전자두뇌에는 얼굴 인식 시스템이 있어서, 희망이가 아무리 자란다고 해도 알아볼 수 있어.”

“그래도… 길이 엇갈리면 어떡해.”

“길이 엇갈린다면?”


피노는 그 생각을 미처 하지는 못했는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선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는지 종이에 무언가 끄적였다.


“만약 날 찾지 못하겠으면, 주황색 리본이 달린 꽃을 찾으면 돼! 한 송이가 아니라 여러 송이를 놓을게.”

“아…! 그런 방법도 있구나! 피노는 진짜 똑똑해!”

“아하하— 그렇진 않은데….”



“주황색 리본…!”


희망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리본을 찾기 시작했다. 김미영 박사는 갑자기 뛰어가는 희망이를 잡으려고 했지만 웃으며 뛰어가는 모습을 보고 운동장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근처를 돌아다니자 눈에 파묻힌 주황색 리본이 눈에 보였다. 희망이는 계속해서 꽃을 하나씩 주워나갔다. 하나, 둘, 셋…. 꽃은 학교 안까지 이어지더니 옥상 문 앞에 놓여 있었다. 아마 옥상으로 가라는 뜻이겠지.

옥상 문은 잠겨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손잡이를 잡고 돌리자 손쉽게 열렸다. 문을 열고 옥상으로 한 발자국 내딛자, 눈앞에는 마지막 꽃 한 송이와 편지가 바닥에 놓여있었다.


[ 졸업 축하해, 최희망. ]


편지의 내용은 짧고 간결했지만, 마음을 전달하기에는 충분했다. 희망이는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준 편지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한 송이 한 송이가 모여 커다란 꽃다발이 된 꽃을 껴안았다.

- 김에나 (@snnm_EnaA)


 

 

달빛.눈.바람

 


 

새하얀 눈송이들이 어깨에 내려앉았다. 땅에 쌓인 눈의 높이는 어느새 나의 발등까지 차오른 것 같았다. 저 멀리서 괴성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좀비가 또 오려는 건가. 숨을 힘껏 쉬어보니 나의 몸에서 비릿한 피 냄새와 어딘가 꿉꿉한 냄새까지 맡아졌다. 때 타지 않은 눈밭에 다량의 적색 피. 숨을 쉴 수 없었다. 피 냄새가 이리도 역겨웠었나. 점점 커지는 괴성과 발자국 소리에도 난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죄책감에 묶인 발목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실은 당연했다. 난 형들을 죽인 살인마나 다름없었으니까.

*

“PDS 바이러스가 뭐예요, 형?”
“어···, 쉽게 말하면 좀비 같은 거야. 그게 바이러스를 통해서 감염되는 거고.

드디어 지구가 멸망하려나 보다. PDS 바이러스인지 뭔지···, 미친 바이러스 때문에 형들과 나는 거처를 옮겨 다니며 생존하려 애썼다.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어차피 다 감염될 운명일 텐데. ···, 그래도 살아내야만 한다. 그동안 나와 형들의 인생이 너무 불쌍했으니까. 가끔은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차라리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좀비로 살아가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그러나 그때마다 날 붙잡는 형들에 나는 지금까지 살아낼 수 있었다. 형들 아니었으면 난 이미 죽었겠지. 이 세상 속에서 내 세상은 형들뿐이다. 형들 마저 사라진다면 내 세상은 무너질 것이다. 형들이 있어 다행이다. 

무기도 없이 도망치며 살던 어느 날이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우리의 눈에 가득 쌓여있는 무기들이 들어왔다. 이것들이 과연 우리를 언제까지 지켜줄 수 있을 것인가.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겠지. 권총부터 꽤나 무게가 나가는 총, 이미 한껏 핏방울이 묻어있는 식칼까지. 아마 이곳에 있던 생존자들이 쓰던 무기인 것 같다. 

“야, 횡재네 횡재!
저 칼은 한 번 닦고 써야 될 것 같아요. PDS 바이러스 묻어있는 것 같아서.
칼 저 주세요, 제가 닦을게요.

여기에 그 바이러스가 묻어있다는 건가. 맨살에 닿아도 감염은 되지 않는 걸 알지만, 최대한 조심해서 피를 닦아냈다. 이 바이러스만 아니었어도 내 인생이 이리 비참해지지는 않았을 텐데. ···, 이젠 이런 생각도 의미가 없다. 뭐, 내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느새 내 얼굴이 비칠 정도로 깨끗하게 닦인 칼이 보였다. 이 칼로 사람을··· 아니, 좀비를 죽여야 한다니. 도망치는 것에 익숙해지니 언젠가는 내가 직접 공격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잊혔나 보다. 한 평생 도망치기만 했었는데···. 내가 과연 죽일 수 있을까. 과연 내가? ···, 감히 내가? 상상만 해도 헛구역질이 나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기 직전이었는데, 호동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피오야! 잠깐 이리 와보래이!

형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각자 무기를 하나씩 들고 있는 형들이 보였다. 상대적으로 힘이 센 동현 형과 호동 형은 식칼로 단거리 공격을 맡았고, 겁이 많은 신동 형은 가지고 있는 무기 중 꽤나 길고 튼튼해 보이는 총을 들고 있었다.

“피오 너는 이 총 들어. 식칼은 가까이 가야 돼서 위험해.”
“···네. 고마워요, 형.

시야가 뿌예져왔다. 선명히 보이던 형들이 희미해져만 갔다. 형들이 없으면 난 어떡하지. 형들이 없는 삶을 도저히 상상해 본 적도 없는데. 만약에 형들이 바이러스에 전염이 된다면, 그땐···. 자꾸만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 말도 안 되는 상상은 아니었기에. ···,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다. 허상이 늘수록 현재에 집중할 수 없는 법이니까. 

눈을 다시 껌뻑 떠보니 내 손에 쥐어진 총이 눈에 들어왔다. 막막하기만 했다. 총 쥐는 법도 모르는 내가 이걸로 좀비를 죽일 수 있을까. 아니야, 할 수 있어. 형들이 있잖아. 나에게는 의지할 곳이 있잖아. 그러니까··· 괜찮을 거야.

형, 이거 총 쥐는 법 좀 알려주시면 안 돼요?
“아, 일단 이거는···.”

내가 봐도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장난감 총도 만져본 적 없는 나였기에, 더 어색해 보였다. 그래도 형들이 알려준 덕에 제법 태는 갖춰진 것 같았다. 테스트용으로 쏜 발이 명중을 했다. 내가 은근 이런 곳에 재능이 있었던가. 기분은 좋았지만 어딘가 찝찝했다. 이런 거 잘해봤자 뭐해, 어차피 좀비 쏘는 데 쓸 건데. 오히려 끔찍한 재능 아닌가. 허무한 기분이 들었을 때쯤에 거처로 돌아가자는 형들의 말에 머릿속을 장악했던 생각들을 지워냈다. 역겨운 생각은 이제 그만둬야겠다. 

언제 어디서 나올지 모르는 좀비 탓에 우리는 정찰을 하기로 했다. 병재 형과 나. 동현이 형과 종민이 형. 그리고 신동 형과 호동이 형. 정찰 조까지 나눠놨었다. 오늘은 동이 형과 호동이 형의 차례였다. 명석한 동이 형과 힘으로는 1등인 호동이 형. 가장 든든한 형들이었기에 마음 놓고 잠에 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창문으로 어렴풋이 형들의 모습이 비쳤다. 어스름한 달빛이 형들의 어깨에 비쳤다. 이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는 주위를 둘러볼 틈도 없이 바쁘게 살았었는데. 이런 상황이 오니 창문으로 보이는 모든 풍경들을 눈에 담고 싶어졌다. 이미 고장 나 빛이 나오지 않는 가로등, 그리고 그 가로등을 대신해 주는 달빛. 나뭇잎 옷을 벗어 한껏 앙상해진 나무. 어쩌면 이미 바이러스에 감염됐을 지도 모르는 개미 떼들. 오늘따라 왜 이리 소중해 보이는지. 겨울바람들끼리 부닥치는 소리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오늘 새벽은 정말 아무 일도 없을 것만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그런 줄 알았는데.

*

악몽을 꾸었다. 형들이 모두 PDS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꿈. 형들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손상된 외형들이 눈앞에 떠다녔다. 괴이한 소리를 내며 나를 공격하려던 형들. 그리고 그런 형들을 결국 총으로 쏴 죽이고 마는 나. 악몽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냥 좀비를 죽이는 것도 힘들 것 같은데, 형들을 죽이다니. 그런데 왜 이렇게 현실 같지. 내 생애 꿨던 꿈들 중 가장 생생한 꿈이었다. 너무나도 생생한 탓에 숨이 턱 막히고 무언가 목을 옥죄어오는 것 같다. 이대로 계속 누워있으면 그 악몽을 다시 꿀까,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평소처럼 들려야 할 형들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직도 꿈인가 싶어 눈을 한껏 비비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잠에 든 곳과 다른 곳이었다. 사람 사는 곳이 아닌 듯한 고요한 곳. 들리는 소리라곤 싸한 바람 소리밖에 없었다. 형들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형들을 찾으려 침대에서 벗어나 거처 밖으로 나갔다. 아니, 나가려 했다. 형들이 쓰던 무기들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이게 왜 여기 있는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진 그 순간, 온통 피로 뒤덮인 수첩이 눈에 띄었다. 왜인지 읽어봐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수첩을 펼쳤다. 

피오야, 네가 깬 그곳은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무기들은 남겨놨어. 
사용하는 법은 다 알려줬으니까 할 수 있지?
형들 찾겠다고 아무 곳이나 막 다니지 말고.
피오야, 넌 꼭 살ㅇ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떨리는 글씨는 도저히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못 알아보겠어서가 아니라, 너무 무슨 말인지 알겠기에. 그래서 이 수첩 내용들을 부정하고 싶었다. 말이 안 되잖아, 이건. 내 꿈이 예지몽이었던 걸까. 만약 예지몽이 맞는다면 언젠가 내가 형들과 마주해 죽일 수도 있다는 뜻인가. 도저히 말이 안 된다. 그저 지나가는 악몽이기를 바랐는데. 꿈과 현실은 반대라며 자기합리화조차도 할 수 없게···. 대체, 이게 무슨···. 난 이제 어떡하라고. 보살펴주는 것밖에 못하는 사람한테 보살필 사람을 빼앗으면 어쩌자는 거야···.

*

병재 형이 남긴 글 때문일까, 굳이 형들을 찾으려 애쓰지 않았다. 사실 찾고 싶다고 해서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화롭게 지내려 애썼다. 평소처럼 남은 식량으로 한 끼를 때우고, 평소처럼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한적한 풍경을 구경하고, 평소처럼 아껴놓은 물로 머리도 감고, 또···. 평소처럼 형들이 알려준 대로 무기를 다루기도 했다. 평소처럼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달라졌다. 여섯 그릇으로 채워진 식탁은 어느새 한 그릇밖에 남아있지 않았고, 옹기종기 모여서 창문 밖을 내다보던 형들의 자리에는 어느새 싸한 바람과 달빛만이 남아있다. 평소처럼 하던 행동은 평소 같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까지라도 안 하면 자꾸만 형들의 빈자리가 더 잘 보일까 봐. 형들의 환영이 자꾸 거슬릴까 봐. 그래서 그랬다. 

식량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거의 몇 달 만에 거처를 나서는 것 같다. 식량을 구해야 할 곳은 꽤나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형들이 남기고 간 총 하나와 식량을 담을 가방을 어깨에 맸다. 거처 근처에는 가게는커녕,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고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눈까지 내리기 시작해 주위가 더 흐릿해졌다. 형들이 사라진 이후에는 날짜라는 개념을 잊고 살았는데, 어느새 한겨울이 왔나 보다. 눈이 오는 걸 보니 11월쯤이 된 것 같았다. 나는 아직 여름에서 살고 있었다. 여름 특유의 향긋한 내음과 꿉꿉한 땀 냄새가 섞인. 멸망한 세상이라고는 안 믿길 정도로 푸릇푸릇했던 나뭇잎들. 형들과 항상 함께였던 그 여름에서 살고 있었는데. 거처를 나오니까 세상이 많이 바뀐 게 보이며 깨달았다. 형들이 남긴 글 때문에 거처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꿈이 현실이 될까 두려워서. 현실을 애써 부정하고 싶어 시간이 멈춘 거처 안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나는 비겁한 사람이구나. 

1시간쯤을 한참 동안 걸었을까. 드디어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곳은 이미 눈이 폭삭 쌓여있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가게처럼 보이는 곳이 나왔다. 다행히도 다른 생존자들이 다녀간 곳이 아닌 건지 식량들이 잔뜩 쌓여있다. 비록 유통기한은 한참 지난 것 같지만, 굶어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상한 음식이라도 먹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렇게 좀비는 한 마리도 보지 않고 안전히 식량을 챙길 줄 알았다. 그 찰나에, 가까운 어딘가에서 좀비의 괴성이 들려오는 것 같다. 급하게 매고 있던 가방은 가게 안으로 던져놓고 어깨에 올려두었던 총을 장전했다. 그리고 뒤를 돌던 그 순간. 어딘가 익숙한 옷들이 눈에 띄었다. 왜 이렇게···, 형들 옷이랑 비슷하게 생긴 거지. 심호흡을 한 뒤 고개를 살짝 위로 들었다. 머리 위로 떨어지던 눈송이들이 멈추는 기분이 들었다. 얼굴은 여느 좀비나 다름없이 손상돼있었지만, 나는 단 한순간에 형들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허망한 마음에 헛웃음을 치던 찰나에 형들이 다가왔다. 어차피 형들 빼고 다른 좀비는 없기도 했고, 그때 꾼 꿈처럼 형들을 죽이는 건 절대 못 할 것 같아 그 공간에서 도망쳐 나왔다. 뒤에서 형들의 괴이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그러나 곧 내 눈앞에 나타난 막다른 길 때문에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 형들의 괴성이 더 크게 들려왔다. 

숨을 꾹 참고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서 나에게로 달려오는 형들이 보였다. 여기서 내가 형들을 죽이면, 나중에 백신이 나와도 형들을 살리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형들에게 물려서 죽기에는···, 미처 다 쓰지 못한 형의 마지막 말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넌 꼭 살라는 그 말. 형,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돼요. 제발 가르쳐 주세요, 형···. 

형들이 거의 내 앞에 왔을 때쯤이었나, 나는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선 형들의 괴성이 들리는 쪽으로 총을 돌렸다. 

탕-!

살며시 눈을 떴다. 내 눈앞에는 다량의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는 형들이 보였다. 비릿한 피 냄새와 차가운 겨울 냄새, 그리고 좀비 특유의 눅눅한 냄새를 맡으니 숨이 가빠져왔다. 총성 소리가 꽤 크던 탓인가, 저 멀리 있던 좀비들도 내가 있는 쪽으로 오는 것 같았다. 어서 총을 재장전하고 도망치며 좀비들을 죽여야 되는데. 그런데···, 죄책감에 도저히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형들이 좀비가 됐다는 건 외면하고는 있었지만 얼추 알았던 사실이었다. 다만, 그때 그 악몽처럼 형들을 진짜 죽일 거라곤 상상밖에 못해봤다. 살인자가 된 기분이었다. 아니, 난 살인자다. 새하얀 눈밭에는 형들의 적색 피가 흐르고 있고, 내 눈에는 눈물방울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더욱더 커지는 좀비들의 괴성 소리에 나는 눈을 다시 감았다. 난 꼭 살라며···. 그렇게 말했으면서 날 두고 떠나면 어쩌자는 거야. 이미 형들은 내 세상이었는데···, 그러면 살아도 산 게 아니잖아. 내 주머니 안속에는 형들이 남기고 간 수첩이 아직도 있는데···. 

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형들이 말했던, 난 꼭 살라는 말. 못 지킬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게 이미 수천 번은 읽어 다 헤져있는 수첩을 손에 꽉 쥐고 눈밭에 파묻히듯이 쓰러졌다. 형···, 내가 곧 갈게요. 

그렇게 내가 들었던 마지막 소리는, 
날 향한 나의 총성 소리였다.

- 살怪마 / 대과 ( @daegwa_6)



 

뽀독, 뽀드득.

 

가끔 들짐승만 찾는 깊고 깊은 산 속, 눈을 지려 밟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지 확인해 보라는 바람의 재촉에 나뭇잎들이 모두 발소리의 주인공을 살폈다.

 

“하아… 하….”

 

금발의 작은 남성이 하얀 한숨을 내뱉으며 나무 하나를 붙잡고 선 모습에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히며 수다를 떨었다.

 

아… 더 못 버티겠다…. 포기할….

 

나무를 잡고 버텨보려 했지만 실패한 듯 속절없이 무너지는 남자의 몸에 놀란 눈들이 빠르게 금발의 남자를 받아냈다.

 

털썩.

 

눈 덕에 안전하게 쓰러진 남자를 나뭇잎이 톡톡 건드렸지만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나뭇잎들이 수다를 멈췄다.

 

바람 또한 많은 이들이 두려워하는 겨울날의 추위 대신 포근한 이불이 되어 남자를 품었다.

 

달도 남자 주변에 몰린 어둠이 조금이라도 떨어지길, 조금이라도 따뜻함을 느끼길 바라며 남자에게 달빛을 내려보냈다.

 

*

 

“하아…. 후… 힘들다.”

 

크기가 제법 되는 산을 전부 둘러보고 빠져나오자 어느덧 해가 떠 있었다.

 

“어, 여기는….”

 

아침 햇살이 주변을 밝히자 보이는 것은 폐장된 놀이공원이었다.

 

“아차랜드….”

 

눈 내린, 온통 새하얗기만 한 아차랜드는 전에 와봤을 때와는 느낌이 또 달라서 가만히 보다가 조심히 내려갔다.

 

깨끗한 순백의 공간에 뽀득, 뽀득 병재의 발자국이 새겨졌다.

 

“피오야! 형들! 여기 있어요?”

 

크게 소리치자 넓은 공간으로 병재의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기에 사방을 살피며 걷던 병재의 발에.

 

턱.

 

“?”

 

무언가 채였다. 뭐지, 라는 의문이 경악으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었다.

 

“피오야! 피오야, 너 괜찮아?! 지훈아, 눈 좀 떠봐!”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하얗기만 하던 바닥에 붉은색의 혈흔이 흩뿌려져 있는 꼴은 병재를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그 위에 쓰러져 있는 피오는 말할 것도 없이.

 

“피오야, 누가 그랬어. 응? 눈 좀 떠봐, 제발.”

“도…, 망‥.”

“피오야!”

“누구십니까?”

“?!”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도 안 들렸고, 더군다나 그가 다가온 길에는 발자국도 없건만.

어느새 병재 앞으로 다가온 조지훈이 철근을 높이 들어 올렸다.

 

병재의 몸이 떨렸다. 죽음의 공포 때문은 아니었고, 조지훈이 무서워서는 더욱 아니었다.

 

저 철근에 묻은 붉은 선혈이 피오의 선혈일 거라는 생각에, 피오를 저렇게 만든 게 저자라는 생각에.

 

분노로 몸이 떨려온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분노에 몸서리쳐도, 병재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

.

얼마나 달린 것인지 어느새 병재는 웬 운동장에 서 있었다.

오후쯤인 건지 따가울 정도의 햇살이 내리쬐고 있는.

 

뭐야, 여긴….

 

“병재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동이 형.”

“왜 그래? 표정이 멍한데.”

 

멍하다고…? 그러고 보니 방금까지 뭐 하고 있었더라.

 

잠시 눈을 깜빡인 병재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동현이 형은요?”

“아, 그게….”

“동이 형?”

“무간 FC 나간다 해놓고 아직 안 돌아왔어.”

“무간 FC요? 무간 FC는….”

 

밤에 하는 거 아니었나? 아니, 무슨 소리야. 여기는 처음 와 보… 나?

 

울리는 머리통에 잠시 머리를 털다가 신동이 거칠게 팔을 잡자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형?”

“뛰어!”

 

뛰면서 뒤를 돌아보자 교도소 안에서 좀비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잠시만, 동현이 형은!”

“아직 안 오는 거면 이미 늦었어, 그러게 가지 말라니까 진짜.”

 

멀게만 느껴지는 초소 쪽으로 한참 뛰다 신동이 좀비한테 붙잡히며 넘어졌다.

 

“형!”

“가! 카드키 말고 열쇠 잘 챙기고!”

 

신동의 외침에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잠시 망설이다 다시 몰려오는 좀비들에 병재가 빠르게 정문초소로 달려가 열쇠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쾅!

 

문을 세게 닫고 주저앉은 병재가 숨을 몰아쉬었다.

 

“동이 형이….”

 

한참 숨을 몰아쉬다가 병재가 떨리는 다리를 움직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나가야 해. 나가서 뭐든 해야 형을 살리든 말든 할 거 아니야.

 

뺨을 두어 번 가볍게 치고 병재가 밖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하지만 병재에게 희망을 주지 않을 거라는 듯 문을 열자 나타난 공간은 더욱 절망적이었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도끼에 여러 번 맞았는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호동과, 천마도령의 손에 붙잡힌 채 의식을 잃은 듯 보이는 종민.

 

공간에 갑자기 나타난 병재에 놀랄 만도 하건만 천마도령은 그저 웃으며 병재를 바라보다 종민을 데리고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신기루였다는 듯 호동도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밤이 아닌 낮이었다 해서 뭘 할 수 있는 것 없었을 것인데도 괜히 지금이 밤인 것을 원망하며 병재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더는 어디로 나아갈 힘도, 서 있을 힘도 없었다.

 

아, 생각났다. 교도소에 가기 전에 어디 있었는지.

 

피오의 죽음을 봤어. 그다음은 동현이 형이 우리를 지키기 위해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무간 FC에 참여했다가 돌아오지 못했고. 동이 형이 좀비에게 붙잡혔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도망가는 것밖에 없었어. 호동이 형이 쓰러졌지만 놀라서 자세한 상태를 살피러 가지도 못했지. 종민이 형을 데려가려는 천마도령을 말리지도 못했어.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을 뿐.

 

아, 나는 정말로…. 정말로 쓸모없구나. 그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하는구나.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로 한참을 자책했다.

 

더 쓸모있는 존재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형들이 나서는 동안 가만히 있었던 것에 대한, 피오가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동안 옆에 있어 주지 못한 것에 대한.

 

살아있는 것에 대한.

 

자책하고 원망하고. 그렇게 아, 나도 형들을. 지훈이를 따라가야지, 생각한 순간.

 

“뭐야….”

 

빛 한줄기가 날아 들어왔다.

 

벌써 아침은 아닐 텐데, 천천히 고개를 들자 달빛이 내리쬐는 게 보였다.

분명 달은 하늘 높은 곳에 떠 있는데 유난히 이곳만 밝게 비추고 있는 달빛이.

 

어딘가 이질적이고 몽환적인 달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하얀 눈송이가 하늘하늘 내려왔다.

 

천천히, 예쁘게 내려온 눈송이가 병재의 볼 위로 가볍게 내려앉았다.

 

“…. 차갑지… 않아.”

 

그걸 깨달은 순간 5명의 목소리가 동시에 머리에 울렸다.

 

‘꿈에서 깨야지.’

 

*

 

슬며시 눈을 뜨자 온통 하얀 눈밭이 눈에 들어왔다.

 

꿈…. 쓰러졌었지, 참…. 근데 나 왜 앉아있지.

 

분명 눈밭에 얼굴을 박고 쓰러졌던 것 같은데 나무에 기댄 채 바르게 앉아있고 담요까지 두르고 있는 모습에 병재가 머리를 털며 주변을 둘러봤다.

 

옮길 사람이 없는-.

 

“피오야!”

 

느리게 초점이 잡히고 보이는 인물에 병재가 생각을 마무리할 새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병재의 몸에서 스르륵 떨어진 담요를 주운 피오가 웃으며 병재의 손을 잡아당겨 다시 앉혔다.

 

“잘 잤어요?”

“너 뭐야, 어디 갔었어.”

“저도 형이랑 똑같죠, 뭐. 쓰러졌다 눈 떴더니 처음 보는 장소였고, 계속 형들 찾아 돌아다녔어요.”

 

병재 몸이 식을세라 다시 담요를 덮어준 피오가 마저 말을 이었다.

 

“그러다 이 숲까지 왔는데 유난히 여기만 바람이 안 불길래 만약 돌아다니다 지쳐 쉰다면 여기서 쉬겠다 싶어서 와 봤는데 형이 누워있더라고요. 체온 떨어져서 큰일 나면 어쩌려고 눈밭에 누워서 자요.”

“아니, 일부러 그런 건 아닌, 어, 미안.”

 

막내의 표정에 빠르게 사과한 병재가 조심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너라도 있으니까 안심된다 피오야.”

 

피오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고서 얼마 없는 짐을 챙겼다.

 

“그죠? 저 말고도 다들 어디에 살아서 마찬가지로 우리를 찾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피오가 하려는 말을 눈치챈 병재가 피오처럼 웃으며 말했다.

 

“포기금지.”

“포기금지.”

 

언젠가 큰형이 했던 말을.

 

바람이 재촉하지 않아도 나뭇잎들은 그들이 가는 길을 응원하며 배웅했으며.

 

달은 닿는 데까지 그들을 따스하게 비췄다.

 

그리고 그들이 내뱉진 않았지만 속으로 간직하고 있을 소원을 이루기 위한 작은 도움을 주었다.

 

달빛을 따라가기를. 그 달빛이 끝나는 곳에서 소원을 이루기를. 그들을, 만나기를.

-달빛 / 도리 (@dtcu_doli)


 

 

매듭.불면증.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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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찡 (@jjing_JJY)



 

대다수 사람은 동의할 것이다, 이 세상에는 거스르지 말아야 할 자연의 이치가 있다고. 인간으로서 넘지 말아야 할 최후의 경계선. 생명이나 죽음과 직결된 그런 윤리의 선 말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 소설이나 영화에서 볼법한 미치광이 과학자가 떠오를지 모르겠다. 어떠한 연유로 죽음을 정복하고 싶어 하는 이들. 사랑하는 이를 되살리고자, 죽음을 회피하고자, 혹은 단순히 과학과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그렇게 하나하나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이유를 불씨 삼아 밤낮으로 연구에 매달리는 사람들. 

 

종민은 그런 거창한 포부를 품은 적이 없었다. 애초에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고자 벌인 일도 아니었다. 그저 그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방식으로 매듭을 짓고 싶었을 뿐. 그게 설령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순전히 그의 욕심인 걸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어쩌다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걸까, 종민은 초점 없는 눈으로 손에 들린 강령술서를 내려다보았다. 이 모든 일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면, 그 시작은 역시 악령감옥이겠지. 그러나 사건의 뿌리를 찾기는 쉬워도, 정말 간절한 질문에는 명확한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문제의 라디오 뉴스를 너무 가볍게 넘긴 탓이었을까, 아니면 그건 미래를 안다고 해도 막을 수 없는 잔인한 운명의 장난 같은 거였을까.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담을 수 없는 걸 뻔히 안다 해도, 종민의 머릿속은 매번 같은 의문으로 가득 차곤 했다. 죄책감과 후회 그 어딘가 사이에서, 과거의 한순간에 얽매인 채. 

 

그 사건이 발생한 지 어느덧 반년이 훌쩍 넘었지만, 종민은 여전히 그 시간에 갇혀있었다. 끝없는 자책은 불면증을 몰고 왔다. 가혹한 현실을 잠시라도 외면하려 눈을 붙이지도 못했다. 잠깐이라도 잠에 들면, 꿈속에선 어김없이 파로 물든 동료들이 등장했기 때문에. 종민이, 종민의 손으로 살해한 그들. 종민의 의지였는지 아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피를 물든 건 그의 손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으니까. 도무지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하루하루 지옥 같았던 건. 그래서였을까, 자기 탓을 하기 시작한 건. 그 일이 일어나기 전의 종민이라면 이리 말했을지도 모른다. 네 탓이 아니라고. 우린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을 뿐이라고. 그저 운이 나빴던 것일 뿐이라고. 그러니까 자책하지 말라고. 형과 동생들도 그걸 원하지 않을 거라고.

 

순진하긴.

 

이 고통은, 이 죄책감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괴로움 앞에 얼마나 사람이 무기력해지는지. 수천 번, 수만 번을 어떻게 행동했어야, 어떤식으로 대처했어야 이런 결과를 피할 수 있을지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또 돌려본다. 그러나 끝내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없다. 과거를 되돌릴 순 없으니까. 그때로 돌아갈 순 없으니까. 그에게 남은 건 오직 어떻게든 버텨냈어야 했다는 후회와 눈을 감아도 일렁거리는 동료들의 마지막 모습뿐이었다. 끝까지 네 탓이 아니라며, 죽어가면서도 그를 믿어주고, 또 위로하던 얼굴들.

 

한 번만, 딱 한 번만 다시 보고 싶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망자의 휴식을 방해하는 건 못 할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종민은 행동에 옮겼다. 나약한 자신에 실망하면서도 이대로는 정말 죽을 거 같아서, 벌을 받더라도 달게 받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무릎을 꿇고 그가 아닌 그가 저지른 일에 대해 용서를 빌며,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한 번만 형과 동생들을 다시 볼 수 있다면, 그를 원망하는 눈초리든, 괜찮다고 위로하는 목소리든 더 이상 상관없었다.

 

하늘이 어둠으로 짙게 물든 야심한 시각, 종민은 행동을 개시했다. 결정을 내리기까지가 어려웠을 뿐이지, 선택이 끝나자 더 이상의 망설임은 없었다. 모든 가구를 치워 텅 빈 방 한가운데에 커다란 전신거울을 세우고, 전날 혈서로 직접 만들어둔 부적을 거울 테두리에 덕지덕지 붙인다. 바닥에 초과 향초로 커다란 원을 만들고, 펼쳐둔 책을 참고하며 디테일을 확인한다. 라이터를 집어 향을 피우고, 일렁이는 촛불 그 한가운데에 앉아 눈을 감는다. 주문을 외우고 방울을 흔든다. 

 

딸랑 딸랑 딸랑. 망자의 영혼을 부르는 금기된 주술을.

 

보고 싶은 이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한 명, 한 명 염원을 담아서.

 

강호동.

 

김동현.

 

신동희.

 

유병재.

 

표지훈.

 

떨리는 숨을 내쉬며 속으로 빌어본다. 제발, 제발 누구든 한 번만, 딱 한 번만이라도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세요. 

 

그리고 느리게, 실눈을 뜬다.

 

거울 속에 종민외에 다른 형상이 비쳤다. 참았던 숨을 탁 내쉬며 눈을 제대로 뜨는 순간,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굳어버린 것 같았다.

 

그가 소환한 건 탈출러의 영혼이 아니었다. 이 순간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이 사태의 원흉이 그를 보며 웃고 있었다.

 

"천해명."

 

그의 이름을 내뱉자, 충격에서 벗어나 냉혹한 현실로 돌아옴과 동시에 모든 게 확 와닿았다. 강령술로 불러낸 건 동료들이 아닌 천해명이다. 종민의 몸을 빼앗아 그들을 죽이게 했던 그 장본인. 그 생각이 들자,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너 때문에―!"

 

겁도 없이 성큼 거울 앞으로 다가섰다. 마치 악령을 붙잡듯이 거울을 흔들자, 거친 움직임에 반사된 불빛이 어지럽게 일렁였다. 그러나 거울 속의 천해명은 평온하기만 했다.

 

"이렇게까지 환영해 주다니. 오랜만의 재회에 꽤 감동한 모양이로군."

 "너... 너가 왜..."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 종민을 지긋이 응시하던 천해명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촛불의 원 밖에 놓여있는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날 좀 더 일찍 소환할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오래 버텼군."

"뭐?"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종민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강령술을 준비할 때부터 주로 참고했던 바로 그 서적. 생각해 보니 이 책을 찾은 건 다름이 아닌 악령감옥에서였다. 빙의가 풀리고 정신이 돌아왔을 때, 뭔가에 홀리듯 피 묻은 손으로 집어 든 책이었다.

 

"설마. 내가 이걸 사용할 거라고 예상한 거야?"

"일종의 도박이긴 했다만,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봤지. 참 볼만한 표정을 짓고 있군 그래."

 

본래 종민은 쉽게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진짜로 화난 모습을 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지금, 또 한 번 천해명의 손아귀에 놀아났다는 생각은 그를 폭발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입 닥쳐!"

 

소리를 지르며 온몸을 날리자, 쩍 소리와 함께 거울을 가로지르는 큰 금이 생겼다. 깨진 조각으로 인해 천해명의 얼굴이 어긋났다. 그러나 후련함은 잠시뿐이었다. 거울 속의 악령에겐 전혀 타격을 주지 못했는지, 천해명은 뒤틀린 모습으로 그를 한껏 비웃었다. 

 

귀를 후비고 머리를 헤집는 웃음소리에 종민은 바닥에 나뒹굴던 강령술서를 집어 들었다. 이를 악물고 책을 높이 치켜들었다. 거울을 힘껏 내려치려던 찰나,

 

"후회할 텐데, 날 이대로 보내면."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여유롭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그를 멈춰 세웠다. 그게 무슨 뜻이지? 순간 망설이는 종민의 모습에 승기를 잡았다 확신했는지, 천해명의 입이 한결 더 길게 찢어졌다.

 

"네가 행한 건 강령술이 맞다. 원래대로라면 네가 보고 싶어했던 그자들의 혼이 나타났어야 했지."

 

거짓말이다. 분명 나를 속여서 이용하려는 게 뻔해. 그렇게 속으로 되뇌었음에도, 정작 종민의 입에 튀어나온 말은 머릿속과 딴판이었다.

 

"무슨 뜻이야?"

"내가 왜 네놈의 몸에서 쫒겨났는지 알고 있나? 그래, 계획대로라면 순수한 영혼, 넌 영영히 내 것이어야 했다. 이젠 인정하지. 내가 너희들을 얕잡아 본 거다. 그놈들이 널 위해 기꺼이 생명을 내어준 게 화근이었다. 그것까진 예상 못 했어. 덕분에 난 네 몸에서 강제로 쫓겨났고, 그들은 봉인 당했지. 저세상 깊이 어딘가에. 네가 그들을 다시 볼 일은 없을 거다."

"그게 무슨..."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저절로 다리가 풀렸다. 천해명이 뭐라 계속 떠들어댔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종민은 멍하니 흔들리는 촛불을 바라보았다. 그리운 얼굴들을 다시는 볼 수 없다니. 유일한 소원이었는데.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그들의 영혼을 풀어주면 네가 원하는 마지막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다."

"어, 어떻게?"

 

고개를 들어 악령과 눈을 마주쳤다. 천해명은 웃음을 감추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종민이 어떻게 나올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내가 도와주지. 그들이 자유를 찾을 수 있게. 대신 이 일을 마치면, 너의 모든 걸 내게 넘기겠다고 약조해라."

"너, 널 어떻게 믿어!"

"내가 증명할 수 있는 건 없어. 믿고 말고는 오롯이 네 선택이다. 자, 어떻게 하겠느냐?"

 

종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거절하는 게 맞겠지. 그게 옳은 거였지만, 이대로 다시 원래 일상으로 돌아갈 생각에 숨이 턱 막혔다. 아무 의지도 목표도 없는 공허한 삶.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게 아닌데 남은 인생, 그를 구해준 사람들을 위해 바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을까. 한사람이 5명의 영혼을 위해 희생할 수 있다면, 나쁜 거래는 아닐듯싶었다.

 

내민 손을 한참을 바라보던 종민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손을 뻗었다. 매끈한 유리에 닿을 줄 알았던 손은, 거울을 부드럽게 통과해 얼음장 같은 악령의 손을 잡았다.

 

천해명의 미소가 한껏 뒤틀렸다.

 

"그래, 옳은 결정이다. 내 약속한 바는 꼭 지키지."

 

그와 동시에 몸이 앞으로 확 잡아당겨졌다. 거울에 닿자, 단단한 표면이 호수처럼 일렁이더니 그대로 그를 받아들였다.

종민이 흔적도 없이 거울 속으로 빨려간 자리에는, 꺼진 촛불에서 연기만 피어오를 뿐이었다.

- 나무 (@DiscoveryKim)



 

아침부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이불속에서 꼼지락대던 종문은 손목에 묶인 매듭끈을 보고 꿈에서 나온 웬 이상한 남자가 떠올랐다
색색의 화려한 무당옷을 입고 있던 남자..
어디선가 본 것같은 흐릿한 잔상들이 남자 뒤에 일렁였다
피로 물든 하얀 침대, 그리고 그 침대에 묶인 누군가의 모습..

천천히 되짚어보다가 갑자기 밀려오는 서늘한 한기에 팔을 부비다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났다
분명 어제 잠들기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던 손목에는 마치 많은 이들의 피를 머금은듯한 검붉은 매듭이 묶여있었다
아무리 해도 풀리지 않는 매듭은 손을 대면 댈수록 더 깊게 손목을 파고들어 상처를 남겼고, 살아있는 자아를 가진듯 점점 더 옥죄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 공기에 수면제를 탄걸까
점점 아득해지는 정신에 스르륵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없는 무의 공간..하얗게 빛나는 그곳에 서있는건 분명한 자신이었다
흰색의 머리칼을 가진 '그'는 종문을 보고 힘겹게 웃어보였다

–왔어? 근데, 나 이제는 못버틸것같은데 어쩌지?

군데군데 검붉게 물든 옷엔 어젯밤 꿈에서 본 그 문양이 찍혀있었다
씨익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를 따라 종문 역시 시선을 옮기자 불길한 검붉은색으로 물든 구름에 해가 가려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저거 보여? 우리 처음 만난 날 니가 나한테 만들어달라 했던 빛이야. 이게 있어야 천해명에게 버틸수있을것같다고 했었잖아. 근데..어느날부턴가 저렇게 가려져버렸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시무룩한 표정으로 한참을 하늘을 바라보던 '그'는 문득 종문의 손목에 묶인 붉은 매듭이 눈에 들어왔다
골똘한 얼굴로 한참을 생각하다가 아! 하더니 혹시 어젯밤에 천해명을 만났냐고, 그 사람이 무슨일을 했었냐고 물어보는 눈빛이 퍽 다급해보였다

"음...천해명..은 모르겠구 그냥..무당옷을 입은 사람뒤로 흐릿하게 잔상이 보였어. 지하실에서 있었던 일들이 말야."
–무슨 행동을 하지는 않았어?
"응. 근데 꿈에 나랑 같이 지하실 창고에 갇힌 남자가 있었어. 갓 대학생이 된것같이 앳되보이는데 눈이 너무 슬퍼보였어. 그리고 뭔진 모르겠는데 자꾸 자기탓이라고 했어." 
–혹시..그럼..

나를 기억해...?

갑작스레 변한 '그'의 분위기와 발끝에서 피어오르는 붉은 연기.
똘망똘망하게 빛나던 검은 눈동자는 붉게 변했고 짧았던 머리는  바닥에 닿을정도로 길어졌다
입가에 머금은 비틀린 미소에 종문의 모든 감각이 외쳤다
당장 피하라고, 여길 벗어나라고.
하지만 발이 굳은것처럼 움직이지않았고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 움직일수 있는것은 눈동자와 입술, 그리고 목소리뿐이었다

–순수한 영혼, 오랜만이군. 이 녀석을 길들이는데 꽤나 애를 먹었어. 생각보다 질기더군.

무슨..소리지..

–간단히 말하면 자넨 이제 나를 막지 못한다는걸세. '그곳'에서 날 느낀 순간부터 불면증에 시달렸을테니 이젠 푹 쉬게. 

갑작스레 몰려든 두통과 이명에 신음을 삼키며 바닥으로 쓰러지는 몸에 감각이 없었다
인상을 찌푸리지도 못할만큼 강한 고통이 종문을 덮쳤고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듯한 그를 내려다보는 '그', 아니 천해명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이 몸은 내것이다. 완벽히.

- 현월 (@hyeonwol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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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님 최고  (6) 2023.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