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진짜 배고프다….
“병재야, 어디 아파?”
종민의 물음에 동현과 호동의 눈치를 한 번 본 병재가 힘없이 말했다.
“너무 졸리고 배고파요. 아사할 것 같아.”
“아사는 안 해. 돌아올 때마다 우리 몸 상태도 돌아오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잖아요‥. 배고픈 걸 어떡해요.”
말이라도 좀 공감하고 이해해 주면 안 되나.
“이것 좀 마셔.”
“형 거 아니에요?”
“너 그새 다 마셨더라.”
“형은요?”
“됐어, 너 마셔.”
신동이 건네는 식혜를 받아들며 병재가 튀어나올 뻔했던 입술을 조용히 넣었다.
“고마워요.”
“피오야, 넌 괜찮아?”
“전 제 거 남았어요.”
제3 공업단지 때처럼 차 안에 놓여있던 식혜 하나로 배고픔을 누른 지도 오래, 배고픔이 눌리긴커녕 이제는 식혜가 질리기까지 했다.
가짜 배고픔은 미친, 이게 어떻게 가짜냐. 쇠라도 씹어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자신들이 처해있는 상황이 보통의 케이스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해결되지 않는 배고픔에 괜히 그 연구 결과를 낸 연구원들을 욕했다. 당이 부족해 신호를 보내는 게 가짜 배고픔이면 식혜를 이토록 마셨는데, 가라앉아야 하는 거 아닌가, 하면서.
“종민아, 어디 가노.”
“저 잠시 차에 갔다 올게요.”
“차에?”
“뭐 좀 들고 오게요.”
“혼자 가도 되나?”
“아이, 괜찮아요. 갔다 올게요!”
“알긋다, 조심해라!”
형들이 바로 옆에서 하는 대화도 제대로 듣지 않고 넋 놓고 있던 병재가 갑자기 일어나 어딘가로 향하자 신동이 병재를 쳐다봤다.
“병재야? 뭐 해?”
“형, 여기 육포 있어요.”
“육포?”
병재가 가리킨 곳을 본 신동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병재야, 눈 비벼.”
“눈이요?”
“응, 야무지게 비벼.”
신동의 말에 병재가 의아해하며 눈을 비볐다 떼자.
“아….”
먼지 묻은 붉은색의 노끈이 눈에 들어왔다.
“좀 잘래?”
“아니에요, 괜찮아요.”
“병재야.”
“아, 종민이 형. 차 갔다 온다더니 빨리 왔네요.”
“응, 이것 좀 먹어라, 야.”
“이건 뭐예요?”
종민이 건넨 건 에너지바나 작은 과자, 젤리 같은 간식거리였다.
“혹시 싶어서 글러브박스 보니까 있더라.”
“아, 고마워요. 형은요?”
“난 괜찮아. 너희 먹어.”
형도 먹으라는 동생들의 말을 그냥 넘긴 종민이 몇 없는 간식거리를 전부 동생들에게 먹이고서 동현의 곁으로 다가갔다.
“동현아, 야, 뭘 그렇게 생각해.”
“아! 아, 형 놀래라아.”
종민이 갑자기 툭 치며 부르자 놀란 동현이 펄쩍 뛰어올랐다. 그에 덩달아 놀란 종민도 한 걸음 물러나며 소리를 높였다.
“내가 뭘 했다고호!”
“갑자기 치면 놀라잖아요호!”
“네가 넋 놓고 있었으니까 그렇지!”
“그냥 부르셔도 되잖아요, 아, 진짜 놀래라아.”
“…. 느그 뭐하노?”
투닥거리고 있다가 큰형의 어이없는 목소리에 그제야 민망해진 건지 동현이 모른 척 자연스럽게-전혀 자연스럽지 않았지만.- 다시 단서를 살폈다.
그에 종민도 한 번 웃곤 호동이 찾은 단서를 보며 말을 나눴다.
그런 형들의 모습과 입을 우물거리며 아무거나 보고 있는 동생들의 모습을 번갈아 가며 살피던 동현이 고개를 기울였다.
오늘따라 애들이 좀 이상하네…. 단서 찾을 생각도 안 하고,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고, 탈출할 생각도 없어 보이고.
…. 저긴 평소대론데.
이 풀이가 맞냐 아니냐 투닥거리는 형들 탓에 그냥 예민한 건가 싶다가도 단서에 전혀 관심 없는 동생들을 보고 동현의 의문은 커져만 갔다. 동생들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아니면 이 상황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닌 건가, 한참 고민하던 동현이 손바닥에 주먹을 탁, 치며 결론을 내렸다.
꿈이구나!
꿈에서 꿈이라는 걸 말하면 모든 이들이 자신을 쳐다보며 무섭게 군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기에 입으로는 내뱉지 않고 동현이 속으로만 고개를 끄덕였다.
형들은 너무 현실이랑 똑같아서 속을 뻔했네. 우와, 나 자각몽 처음 꿔 봐. 신기하다. 근데 어떻게 깨지?
고개를 돌려봤다가 한껏 붕방대고 있는 동현을 본 동생 조가 다시 고개를 돌려 숙덕거렸다.
“저 형 뭔가 이상한 생각한 것 같지 않아?”
“그런 것 같은데요.”
“웃기니까 그냥 두죠?”
꿈인데 상황이 내 맘대로 바뀌지는 않는 건가?
공간아, 집으로 바뀌어라, 얍!
… 흠, 안 되네. 도넛 생겨라, 얍! 이것도 안 되네? 무슨 꿈인데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어?
투덜대고 있는데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동현이 몸을 움찔 떨었다.
“동현아, 와 그라노.”
“아니 뭔가 귀신 올 것 같아서. 아니에요, 기분 탓인가 봐요.”
금방 사라진 한기에 별 이상한 꿈이 다 있네, 넘기려던 찰나.
쾅! 탕!!
갑자기 들이닥친 검은 옷의 사내들에 동현이 급하게 동생들을 봤지만, 이미 그들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아니, 미친 꿈이지?? 그지???
꿈은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건만. 동생들이 피 흘리는 모습이 왜 이리 아픈 것인지.
그 아픔에 다른 고통이 있는지 없는지는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며, 빠르게 의식을 잃었다.
“흡!”
“뭔 소리야, 형 놀랄 때 그렇게 놀라요?”
“아니, 아니‥. 와, 나 방금 자각몽 꿨어.”
“자각몽? 그보다 언제 잠 들었노. 방금까지 대화하고 있었는데.”
“그래요? 뭐지, 피곤했나.”
호동과 대화를 끝내고 다시 앞을 보는 동현에게 몸을 기울인 병재가 동현을 불렀다.
“형.”
“엉?”
“목소리 좀 낮춰요.”
“뭐야, 왜.”
무슨 일인지도 모르면서 곧이곧대로 목소리를 낮추는 동현에 병재가 잠시 호동의 눈치를 한번 보고 말을 이었다.
“방금 그거 꿈 아니에요.”
“뭐?”
“지금 아까와 같은 상황이 계속 반복되는 루프 속에 갇혔어요, 저희. 처음은 저, 그다음은 피오, 또 동이 형, 마지막으로 종민이 형. 그리고 지금 형이 지금 갇힌 거예요.”
병재의 말에 잠시 생각해 보던 동현이 웃으며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아하이, 뭐 그런 믿기지도 않는 장난을 쳐-!”
“아니, 형 장난이 아니-!”
“뭐꼬, 와 그라는데.”
“아니, 병재가 자꾸 장난치잖아요.”
그런 동현의 모습에 믿기 어려운 게 당연한 거란걸 알면서도 병재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동이 형이 말하면 좀 나을까 싶어, 말해보라 할 심산으로 뒤를 돌아 형을 불러봤지만, 다른 생각에 빠진 것인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러자 피오가 나중에 다시 말하자는 뜻으로 고개를 젓고는 동현을 말렸다.
“아이, 형. 뭘 그렇게까지 놀려요.”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풀었지만, 병재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지 창밖을 바라보며 입술을 삐죽였다.-물론 속으로만.-
곧 차에서 내리고 종민이 다시 꺼내온 간식거리를 먹으며 동현에게 다가갔다.
“형.”
“응?”
“진짜 장난 같아요?”
“아니, 뭐, 루프? 그게 어떻게 말-.”
“형, 동현이 형.”
“응?”
아까부터 뭔가를 생각하던 신동이 진지한 낯으로 동현을 불렀다.
“혹시 아까, 그니까 꿈에서 뭐 이상한 거 없었어요?”
“너희가 이상했는데? 탈출할 생각도 없어 보이고.”
“그런 거 말고. 약간 기시감이 느껴진다 해야 하나, 뭐 그런 거요.”
“몰라? 그냥 너희가 이상해서 자각몽이란 걸 깨달았고…. 아, 깨기 좀 전에 한기 한 번 느끼긴 했다. 이게 왜? 너도 그거 꿈 아니라고 장난치려고?”
“아니, 형이 믿든 말든 그건 관심 없고요.”
제법 아무렇지 않지 않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 신동이 이번엔 병재를 불렀다.
“병재야.”
“네?”
“혹시 너는 갇히기 전에 기시감 같은 거 느꼈어? 나는 계속 누가 있는 듯한 소리가 들렸거든.”
“너무 오래돼서 잘 기억 안 나기는 하는데…. 아마, 이 공간 자체에 느꼈을 거예요. 이상하잖아요. 생긴 것도, 보수 작업을 몇 차례나 진행한 것 같은데 지워지지 않은 총 자국이랑 핏자국도.”
“피오는?”
“저도 병재 형이랑 비슷해요. 그거 말곤 딱히? 왜요, 뭐 알겠어요?”
작게 고개를 끄덕인 신동이 종민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했고, 기시감보다는 당장 이 건물을 벗어나야 할 것 같은 감? 같은 것을 느꼈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
“너도 알겠지, 병재야.”
“네, 의외로 간단했네요.”
“뭐야, 뭔데?”
“기시감.”
“기시감.”
동시에 대답한 병재와 신동이 서로를 보며 씩, 웃었다.
“그거야. 그게 우리를 이곳에 갇히게 하는 원인이었어. 지금 이 상황이 평범하지 않다는 걸 느끼는 순간 갇히는 거야.”
“아니, 너희 장난을 뭐 그렇게 진지하게.”
“아직도 장난 같아요? 형 눈치 진짜 없다.”
막내의 한마디에 머리를 긁적이며 동현이 코를 쿨쩍 먹었다.
“아니, 솔직히 믿기 어렵잖아.”
“우리 분위기가 평소와 다른 것만으로 혹시? 싶겠다. 아까 형이 웃을 때 병재 형이 얼마나 무안했겠어요.”
“맞아, 눈치도 없고, 신뢰도 없고.”
“아, 미안, 미안. 근데 솔직히 아직 안 믿겨.”
“아, 진짜.”
진심으로 투덜거리는 듯한 병재에 작게 웃은 신동이 다시 말을 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지금 호동이 형한테 기시감을 느끼게 해야 해. 그게 너희처럼 공간에 대한 기시감이든, 나처럼 소리든, 형들처럼 감이거나 꿈이든. 평범한 상황은 아니라는 걸 인식시켜야 해.”
신동이 이상한 소리 난다고 난리 칠 때도 그 어떤 기시감도 느끼지 못했던 형이기에 그 방향은 빠르게 포기하고 포지션을 바꾸기로 했다.
“그러니까 알겠죠, 종민이 형? 최대한 똑똑한 척해야 해요, 저희는 바보인 척할 테니까. 동현이 형은 아직도 안 믿을 거면 그냥 구석에 박혀 있어요.”
유난히 동현에게 박한 병재의 말에 동현이 머리를 긁적였다.
“나 뭐 안 해도 돼?”
“사고나 치지 마요.”
“풉, 병재 제대로 삐졌네.”
“안 삐졌어요.”
“어쨌든 빨리 가요. 호동이 형이 뭐라도 느껴야 저희가 뭐든 해보죠.”
“그래.”
그렇게 혼신의 똑똑한 척과 바보인 척, 김호들인 척을 했고 그 결과는….
“느그 와 단체를 나를 보고 그라노.”
“아, 아니‥.”
“형 뭐 이상한 거 없어요?”
“응? 없는데 와 그라노.”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역시 우리의 큰형!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
“형은 이제 믿죠?”
“여기까지 와서 안 믿기도 힘들겠다, 야.”
“그럼 같이 머리 좀 굴려요. 어떡해야 할지.”
숙덕거리는 동현과 병재에 호동이 신동을 쳐다보자 신동이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생각에 빠졌다.
방법을 모르겠네…. 기시감…. 어? 잠시만‥.
“느그 진짜 와 이라노. 어데 아프나.”
“…. 형.”
“어?”
“갑자기 생각나는 건데.”
신동이 뭔가 떠오른 듯 입을 열자 투닥거리던 병재와 동현도 신동을 쳐다봤다.
“저희 1년 전쯤에, 폭탄 처리하러 갔다가 SSA 요원 하나 만났던 거 기억해요?”
“요원?”
“왜, 폭탄 해체 반이라고 했는데 동현이 형이랑 둘이 갇혀서는 SSA는 저희를 모든 사건 사고의 중심으로 판단해 죽이려 한다고 했던. 동현이 형이 감으로 폭탄 해체해서 나왔었잖아요.”
“아아, 기억난다, 그때 얼마나 놀랬었‥.”
호동이 말을 멈추고 신동을 보자 신동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상하죠. 그때는 저희를 죽이려고 했었으면서. 1년이 지난 지금 갑자기 도움을 요청한다는 게. 그때는 모든 사건 사고가 저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했었으면서, 지금. 사건 사고로 저희를 끌어들이고 있잖아요.”
“….”
잠시 생각하던 호동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종민을 불렀다.
“종민아.”
“네?”
“차 돌리라.”
“돌려요?”
“그래, 또 우리 죽일라고 유인한 거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까먹고 있던 존재, 1년 전 만났던 한 요원.
신동이 그 존재를 거론하자 순식간에 가라앉은 분위기 속, 신동은 속으로 안도했다.
이 정도면 기시감으로 충분할 거야. 이제 진짜 모두가 갇히겠네. 이제야, 진짜 시작이겠네.
차를 돌리자 지금껏 그래왔듯 SSA는 총을 쐈고 금방 이번 루프도 끝났다.